스타트업 적응기 #24 – 무모한 도전의 종료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어줍지 않게 주변 동료들보다 깨어 있다고 생각했고, 비록 몸은 대기업에 있지만 스타트업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직접하면 남들보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습니다.

과거에 주로 ‘연구소’ 조직에 있다보니 사업조직에서 벌어온 돈의 일부를 예산으로 할당받아서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 아름답게 사용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는데, 막상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니 어쩔줄 몰라서 당황하기도 했었고 경험이나 역량에 비해서 과도한 책임과 권한은 오히려 조직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주어진 스타트업 2년여간의 경험은 과거 10여년동안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스스로도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배운 것도 많았지만 이제는 회사와 나 자신을 위해서 떠나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느꼈고 스타트업 초보 CTO로서 도전을 멈추고자 합니다.

도전을 멈추면서 스타트업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회고를 해보면..

초기에 BM 얘기를 들으면서 ‘이건 성공을 못할 수 없어!’라는 자신감이 들었던 나머지 비록 지분 1도 없지만 연봉까지 깎아가면서 합류했습니다.

지금 뒤돌아보면 ‘다이소’라는 거물급 브랜드로부터 투자를 받은 이후에 후속 영업 브랜드가 ‘이디야’였는데 포인트(멤버십) 비지니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나머지 결과적으로 제휴에 실패했고 그 이후 후속 전략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초기 투자금을 소진하고 Death Valley에 진입했던 것 같습니다.

이디야의 사례에서도 그랬지만 오프라인 비지니스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영업이나 제휴를 가면 언제나 잡상인 취급 받기 일쑤였고 그나마 다이소 브랜드 덕분에 여러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역시 시장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그 기회를 번번히 놓쳤습니다.

투자금 소진 이후에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이소로부터 운영비를 받기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실패하는 그 길이고 독배임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서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운영비를 받기 시작하면서 회사 리소스의 대부분을 ‘갑’님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서 투입하다보니 1년이 지나도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서비스 개선이나 상품을 개발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자금 운영이 안정화된 이후에 유능한 분들이 합류했지만 서비스 히스토리와 레거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합류하시는 분들마다 새로운 혁신적인 시도를 하려다보니 번번히 걸림돌이 되었고 맥락을 동기화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한시가 바쁜 와중에 내부 정리를 하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모회사에서는 1년 단위로 사업계획과 성과를 체크하다보니 그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과 정작 시장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로 그나마 남은 리소스도 분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서는 각기 업무가 세분화되어 전문성을 가지고 대응하는데 반해서 그 역량을 모두 갖추지 못한 작은 조직에서는 기존 멤버들이 그 업무를 나눠서 처리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미숙함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악순환도 불가피 했습니다.

스타트업에 관한 성공/실패 스토리를 여러 채널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그 스토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그 중 하나가 대기업 출신들이 스타트업에 합류하거나 만드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었는데 막상 경험해보고나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 관련 행사나 주변 소개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성공사례를 많이 가지고 있는 분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대부분 뭐라 명확하게 표현하기 힘든 요소였지만 그 중 하나는 바닥을 박박 기어서 시장을 배우고 개척해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되돌아보니 저나 포인트웰은 대기업에서 했던 방식대로 우아하게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지 시장을 박박 길 준비는 안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포인트웰에 합류할때 박박 기어서 시장을 찾는다는 생각보다 과거 회사들에서 경험했던 답답했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도 착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회사들에서는 ‘답’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 답을 선택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안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고 만약 제가 조직에서 그 권한을 가진다면 ‘상식’이 통하는 의사결정을 하리라 다짐했지만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들이 너무 많아서 막상 저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떤 작은 스타트업이 직원을 채용할때 만장일치제를 선택했다고 해서 참 바보같은 선택이라고 비웃었지만 지나고나니 그 선택이 옳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조직에서 한사람 한사람의 비중이 큰 만큼 그 사람의 성향이 조직 자체에 스트레스를 줄 수 있고 조직을 통채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20여년 조금 안되는 회사 생활 동안 꿈꿨던 이상적인 조직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데 오로지 욕심으로만 시도했던 무도한 도전도 마치려고 합니다.

퇴사를 결정한 후에 팀원 한명이 묻더라구요.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으세요?’

정말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제 능력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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